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.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. ※자료문의 : 한국학중앙연구원 031-730-2705
[개설]
보평전은 고려말 공민왕 이후 나타난 왕이 업무 보는 건물로 일종의 편전이다. 『조선왕조실록』에는 보평전에서 조준(趙浚) 등이 천거한 인재를 시험 보았으며, 정사를 결정할 일이 있을 때 신하들이 보평전에 불쑥 들어와 보고하니 무례하므로 앞으로 미리 고하고 여쭌 다음에 들어오도록 했다는 내용이 있다[『태조실록』 2년 6월 13일]. 당시는 한양으로 천도하기 전이므로 이때의 보평전은 개경의 궁궐에 있었으며, 위의 기사 내용을 통해 보평전이 편전의 기능을 가진 전각임을 알 수 있다.
[위치 및 용도]
경복궁 창건 기사에는 ‘보평청’이라고 되어 있다. 그 배치는 다음과 같다. “연침(燕寢)은 동·서 소침과 행랑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 남쪽에는 천랑이 있어서 보평청(報平廳)과 연결되었다. 보평청은 5칸으로 정사를 보는 곳이고 연침의 남쪽에 있다. 동쪽과 서쪽에 이방(耳房)이 각각 1칸씩이며, (중략) 이상이 내전(內殿)이다.”[『태조실록』 4년 9월 29일] 10월 7일에는 정도전(鄭道傳)에게 명하여 각 전각의 이름을 정하게 하였는데 연침은 강녕전(康寧殿), 보평청은 사정전(思政殿)이라고 하였다. 이러한 기록으로 볼 때 여기서의 보평청은 사정전의 이름을 짓기 이전에 일반명사로 쓰인 것임을 알 수 있다. 경복궁의 보평청을 사정전이라고 이름 지은 후에는 몇 번 이를 보평전으로 칭하는 기사가 등장한다.
1405년(태종 5) 창덕궁을 짓고 여기에 편전과 보평청을 따로 지은 이후[『태종실록』 5년 10월 19일] 『조선왕조실록』에서 보평청이라는 단어는 창덕궁의 전각을 가리킬 때 사용되며 보평전은 경복궁의 사정전을 달리 칭한 말로 쓰였다. 이외에 보평전의 위치와 기능을 알려주는 『조선왕조실록』의 기사로는 “근정전에 나아가 조회를 받고, 보평전으로 옮겨 나아가 정사를 보고, 경연에 나아갔다.”[『세종실록』 7년 4월 21일]고 하는 것이 있다.
[변천 및 현황]
경복궁의 보평전은 사정전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세종대에 사정전을 다시 지으면서 강녕전과의 사이에 행각이 생기고 침전과 편전의 구역이 명확히 나뉘게 되었다. 이에 따라 편전은 내전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외전에 속하게 되었다.
[형태]
5칸에 이방(耳房)을 동서쪽에 각각 1칸씩 단 형태이다. 이방은 본 건물의 양옆에 부가된 것으로 편전과 연침에서만 보이는 형태이다.
[관련사건 및 일화]
1401년(태종 1) 태종이 보평전에서 정사를 보던 중 사관(史官)이 전 아래에 들어오니, 환관을 내보내는 일이 있었다. 태종은 보평전이 편안히 쉬는 곳이므로 사관이 반드시 들어올 곳이 아니라고 보았던 것이다.